실론의 나라 스리랑카
시기리야 고대도시(Ancient City of Sigiriya; 1982)
시기리야 고대도시는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높이 180m의 화강암 바위인
‘사자의 산’을 뜻하는 말로 형상이 사자와 비슷하며 절벽 위에 세워진
고대 성채의 유적, 암괴의 서쪽 중복에 뛰어난 벽화가 있어 유명하다.
성채가 세워진 암석 절벽은 경사가 급하며 상단부가 양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정상부의 해발 고도는 349m이며, 주변 평야를 기준으로 한 높이는 180m에 이른다.
역사적으로는 부왕 다토세나(Dhatusena)를 죽이고 477년 스스로 왕이 된
카시야파 1세(Kashyapa I; 477∼495)가 동생 무갈란(Moggallana)의 보복이 무섭고
두려워 시기리야 바위산에 산 아래로는 주변에 성곽과 해자를 설치하고
산기슭 동쪽과 서쪽에는 정원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시가지를 세우고
넓이가 약 2ha인 평평한 정상에는 좁은 계단과 길들로 연결된 요새화된 왕궁을
7년 동안 건설한다. 그러나 11년 뒤 동생 무갈란의 공격으로 카시야파 왕은
전쟁에서 패하고 종국에는 자살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바위산 정상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거대한 사자(sinha)의 벌어진 입처럼 생긴 입구와
목구멍처럼 생긴 좁은 통로(giriya)를 거쳐야만 한다.
시기리야 란 이름은 사자산 꼭대기로 연결되는 통로 모양에서 유래되었다.
거대한 사자 입 부분에서부터 오르기 시작되는데 회랑과 계단에 오르면
산 중턱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사자 앞 발조각상의 성문 유적이 남아있다.
특히 바위산 암벽에는 천상의 여자들이 그려진 유명한 암벽화가 남아있다.
산 아래로는 연못과 리조트, 마을들과 숲, 그리고 사원들이 뛰어난 경관을 연출하며
시원하게 펼쳐진다. 시기리야 세계8대 불가사의 시기리야는 사자 바위라는 뜻이다
사자의 모습을 한 절벽 위에 궁전을 세웠다 200m 화강암반 정상에 누가 궁전을 지었을까
5세기 다투세나 왕의 장남 카샤파는 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우려해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평민 출신 어머니를 둔 자신과 달리 동생은
왕족 출신 어머니를 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동생의 보복이 두려웠던 카샤파는
바위산 위에 궁전을 세웠다 그러나 11년 후 인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이복동생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자살한다 동생이 오는지 내려다보며 늘 불안해했던 왕은
동생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입구를 하나만 만들었다 정상까지 계단은 12000 여개다
요새 바위 중간 쯤에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ㅡ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ㅡ
스리랑카의 중북부 지역에 속하며, 993년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가
파괴된 이후부터 건설된 이 고대 도시는 스리랑카의 두 번째 수도였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에는 촐라 왕조(Cholas)가 세운 브라만 교의 기념물뿐 아니라
12세기에 파라크라마바후 1세(Parakramabahu I)가 만든 전원도시(garden-city)의
놀라운 기념물 폐허가 남아 있다.폴로나루와 고대 도시 는 몇 개의 문명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데 특히 브라만 교를 신봉한 정복 세력 촐라 왕조의 문명과 12세기와
13세기 동안 독립을 유지했던 신할리즈 족(Sinhalese)의 문명을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에 과대 망상적인 군주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건설한 이 어마어마한
수도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도시 건설 중 하나이다. 이는 그 특별한 규모 때문이기도 하고
건물과 자연 환경의 매우 특수한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불교와 신할리즈족 역사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곳에 있는 부처의 치아는 신할리즈 족 왕국의 수호물로 여겨진다. 비자바야후(Vijabayahu)의
치세 때 만들어진 아타다게(Atadage; 佛齒寺) 속에 넣은 놀라운 유물인 부처의 치아는
신할리즈 군주제의 부적으로 간주되었다. 부바나이카바후 2세(Bhuvanaikabahu II)가
그것을 제거하자 폴로나루와는 쇠퇴했다. 993년 라자라자(Rajaraja)에 의해
아누라다푸라가 파괴되면서 8세기 동안 왕의 임시 거주지였던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수도가 되었다. 정복 세력인 촐라 왕조는 자신들의 종교인 브라만 교의 기념물과
특히 멋진 동상들이 서 있는 시바(Shiva)의 신전들을 건축했다.
신전에 있던 동상들은 현재 콜롬보 박물관(Museum of Colombo)에 소장되어 있다.
비자바야후 1세가 실론(Ceylon)을 재정복했을 때도 이 도시는 수도로서의 역할을 계속했다.
1070년 이후 이곳은 불교 성소로 뒤덮였는데 그 중에서 아타다게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의 전성기는 12세기였다. 당시 두 군주가 연속하여 기념물들을 남겼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1153~1186)는 3중벽으로 된 성곽 안에 굉장한 전원도시를 만들었다.
이 도시의 궁전과 성지들은 전원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뒤따르는 기념물들은
그의 치세 기간에 만들어졌다. 거대한 불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커다란 벽돌
구조물 랑카틸라카(Lankatilaka), 신할리즈 족 예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거대한 바위
조각품이 있는 갈 비하라(Gal Vihara), 자타카(jataka; 本生譚, 부처의 전생을 묘사한
설화)를 묘사한 13세기 벽화인 티반카 필리마게(Tivanka Pilimage) 등이 그것이다.
니삼카말라(Nissamkamalla)는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것만큼 정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뛰어난 기념물들을 빠르게 건축했다. 그중 지름 175m, 높이 55m의 거대한
사리탑인 랑코트 비하라(Rankot Vihara)가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이다.
그 배치와 규모가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다가바(dagaba; 석가의 유골을 넣은
성 건조물)를 연상시킨다. 이 황금시대 이후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마지막에
쇠퇴하기까지 1세기 동안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도시는 타밀 족(Tamils)과
마가 족(Maghas)에 의해 침략당하고 위태로운 체제에 재정복 당했다.
쿠루네갈라(Kurunegala)에서 정권을 세운 브후반나이카부하 2세(Bhuvanaikabuha II)가
침략한 13세기 말까지 이 도시는 정기적으로 수도가 되었을 뿐이다.
ㅡ갈레 구 도시와 요새ㅡ
16세기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건설되어 18세기경
그 발달의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 유적은 남부 및 동남아시아에서
유럽 인들이 건설한 요새 도시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며 유럽의 건축술과
남부아시아의 전통이 상호 작용한 사례이기도 한다.
ㅡ석굴 사원인 담불라 황금 사원ㅡ
스리랑카 중부 지방의 마탈레 지구(Matale District)에 위치한다.
성소 5군데와 함께 약 2,200년 간 내려온 신성한 성지 순례 유적지이다.
이 황금 사원은 스리랑카에 있는 석굴 사원 가운데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되어 있다.
황금 사원 안에서도 넓이 2,100㎡에 이르는 불교 벽화와 157개의 불상과
신상이 특히 유명하다. 사원에는 스리랑카 캔디(Kandy) 학파의 18세기
예술의 중요한 걸작들이 있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든 불교 석굴 사원 중심지인
담불라는 오늘날까지도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석굴 사원들은 바위로 된 성소로 확장되었고, 석굴을 가리기 위해
벽돌을 쌓아 벽을 세웠다. 12세기 말에 이르러 니산카 말라(Nissanka Malla) 왕에 의해
상층부에 있는 동굴 바위에 조각을 하는 기법이 도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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