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이었던 알천, 필탄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 2,000명을 뽑아서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모두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 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었다.
부산(富山)이라는 산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00 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이고 또 뒤따라온 후속부대 1200 명도 모두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놀랍게 여겨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개구리가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 분황사 석탑 : 분황사도 선덕여왕때 건립된 사찰이다. |
여근곡 안내판 |
왕이 대답하기를,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의 형상이다.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경(陰莖)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 빛은 서쪽을 뜻한다.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또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다.
백제의 군사가 신라의 여근곡에 숨어 있으므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러움과 슬기로움에 탄복하였다.
선덕 여왕의 지혜로 신라는 백제군을 간단하게 무찔렀다.
신라로서는 크게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쉽게 적병을 무찌른 셈이다.
여근곡(女根谷)은 실제로 경주 근교 건천에 소재한 골짜기로
그 모양이 여성의 성기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여근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옥문지(玉門池)의
‘옥문’과 여근곡(女根谷)의 ‘여근’을 연결시키고
‘성난 개구리’와 ‘백제군’을 연관시켰다.
여근곡 |
여기에 ‘여성=음=백색=서쪽’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적용하여
적군의 위치를 정확히 지목해낸다.
마지막으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다.
” 라고 말한 부분은 이 일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 화랑세기의 내용처럼 신라시대는 남녀관계가 매우
개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 황남대총 옆 황남리 고분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신라 토우는 나체와 과장된 성기, 성교 중인
모습 등 화랑세기 처럼 표현이 거침없다. 이런 토우는
다산을 염원하는 의례적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신라
토우는 나체와 과장된 성기, 성교 중인 모습 등 화랑세기 |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21세기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1400년 전에 선덕여왕은
남자 신하들 앞에서 거침없이 풀이하고 있다.
여왕의 말을 들은 신하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오히려 신하들이 당황했을 법하다.
그러면서 선덕여왕의 지혜와 담대함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