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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

소촌 2017. 7. 7. 12:11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

 

 

 

1920년대 말, 일본이 내지르는 거친 호흡 속에서 조선이 서서히 무너져갈 무렵, 서양이라는 대륙은 멀고 먼 꿈속의 단어로만 들릴 때,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였던 나혜석은 당시 외교관이었던 남편을 따라 1년6개월이란 오랜 기간 동안 유럽일주를 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얻는다.

당시 이미 고만고만한 어린 자식 셋을 둔 젊은 엄마였던 나혜석은 자식들을 나이 드신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용감하게 남편을 따라 나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한다. 남편이 독일에서 근무할 동안 그는 혼자 파리에서 3개월간(자료에 따라 6개월로 기록되기도 했다) 머물게 된다. 당시 파리의 미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나혜석이 파리에 머문 기간은 정확하게 1927년 8월부터인데 파리 근교인 르베지네에 있는 한 프랑스 가정집에서 묵은 걸로 되어있다. 나혜석은 이 집에 머물면서 파리에 있는 화가 비시에르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면서 서양미술을 공부했다. 당시 파리 화단에서는 중장년층의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이 군림하고 있었다.

나혜석은 아시아문제에 정통했던 아시아 학자이며 철학과 교수임과 동시에 약소국민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던 '샬레'씨의 집에서 기거했는데 이 집에서 살면서 보고 느꼈던 프랑스 가정 이야기를 조선에 돌아온 이후 여러 잡지에 발표했다고 한다.

 


      나혜석이 파리 체류기간중 묵었던 파리 근교 르베지네 주택. 나혜석은

      3개월간 이 집의 2층에서 3개월간 가량 살며 미술공부를 했다.

 

 

나혜석의 자화상

 

"구미 만유기 1년 8개월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를 다니고, 책상에서 프랑스말 단자(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에도 갔다. 왕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만나 보았다. 프랑스 가정의 가족도 되어 보았다.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이었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무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유럽일주를 마치고 다시 조선에 돌아온 나혜석에게 모든 것은 낯설었다. 머리도 다시 길러야 했고 긴 한복으로 다시 갈아입어야 했으며 시집살이는 다시 시작되었다.

"생활 정도를 낮추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 못하는 것처럼 비애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의사를 죽여 남의 의사를 좆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없는 것 같다…조선 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 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 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이와 같이 활짝 피었던 꽃이 떨어지듯 푸근하고 늘씬하던 기분은 전후좌우로 바싹바싹 오그라들기를 시작하였다…아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파리가 그리워…"

나혜석은 파리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확실한 것은 파리에서 인연이 되었던 남자 최린과의 관계가 조선에서 잘못 받아들여져 이혼을 당하게 되면서부터 기구한 운명의 나락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그 불행했던 시절, 나혜석은 항상 파리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했다. 파리에 돌아갔다면 그녀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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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아름다운황혼열차(黃昏列車)
글쓴이 : 석양노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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