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 철수 작전 (12~24일)
흥남 철수 작전(興南撤收作戰)은 중국인민지원군이 불법으로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2일에서 12월 24일까지 동부전선의 미국군 제10군단과 대한민국 국군 제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편로 안전하게 철수를 성공시킨 작전입니다
1950년 11월 27일 유엔군 사령부는 중국군의 인해 전술로 인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수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에 미군 제1 해병사단이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의 진출을 지연시키면서 철수하는 동안, 흥남으로 집결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 부대들이 해상철수를 개시하여 12월 24일 미군 제1 해병사단 등 마지막 철수부대가 승선할때 까지 약 20일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흥남 철수 작전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1군단과 미군 제10군단의 병사 10만명과 차량 1만 7천대, 피난민 약 10만명과 35만톤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흥남 철수 작전) /위키백과
고작 선원 몇십명이 생활 할 수 있는 LST화물선에 무려 1만 4천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태웠습니다
정상적으로 본다면 이건 말도 안되는 위험한 일이었죠
엄청난 사고로 이어질 위험을 안고 항해를 하였습니다.
각종 기뢰와 위험물이 곳곳에 깔려 있는 흥남항에 접안을 명령하고
인도적인 차원에서 승선을 실행에 옮긴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라루선장은
그날을 이렇게 생생하게 회고하였습니다.
배는 화재의 위험마저 안고 있어
어찌해야 할지 몰라 힘든상항을 고민하던 중
"저 사람들을 모두 너의 배에 태우라"
는 주님의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 운명의 항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항해도중 새 생명인
김치1,김치2,김치3,4,5가 태어나기도 하였고
그렇게 태어 난 아이중 한 명은 신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물도 ,먹을것도,화장실도 없는 배에서 오로지 서서 항해한 3일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리며 질서를 지켜 준
한국인의 모습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흥남부두의 모습
군용선을 타기 위해서 나룻배를 이용하기도 하고...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려는 처절한 몸부림
현봉학교수
현봉학박사의 고향 함흥은 캐나다의 장로교회의
한국본부가 있던 곳으로 정치,문화 ,교육,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중요한 수력발전소가 있는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격한 미해병대가
12만명의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당해 미국과 전세계의 뉴스미디어에
1950년 11월27일 바다로부터 7마일
떨어진 북한의 산악지대에 고립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유엔군은 그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모든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개마고원의
깊은 계곡에 집중포격을 가하였습니다
장진호 상항을 보고받은 맥아더장군은 알몬드장군에게
피해가 더 커 지기전에 철수하라고 명령하였고
곧 미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현봉학박사는 가까이 지내던 반공인사들과 기독교신자,
그리고 자유를 그리워하는 민간인들이 걱정되었습니다
함흥의 기독교인들은 미군 고위층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인
그를 찾아 와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으며
실제로 이들의 미래는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는 절친한 포니대령과 이 일을 상의 했고 ,알몬드장군에게도
민간인의 철수를 건의하였습니다
"군이 우선이오 .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알몬드 장군의 반응은 미온적이었고 장군역시 제 10군단의 10만 여
군대를 철수할 방도를 찾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였고 게다가 민간인을
구출할 권리도, 상부로부터 받은 지시도 없었고 수송수단도 없었습니다.
남북통일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압록강을 후퇴하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2월 5일 평양이 함락되었고, 함흥에 있던 제10군단 사령부가 흥남으로 철수하였습니다.
현봉학박사는 알몬드장군을 찾아 가서 줄기차게 설득하였습니다.
현봉학박사는 자신의 요구가 무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절친했던 참모부장,포니대령,역사소장,쇼트소령이 그를 진심으로 도와 주었습니다
특히 포니대령은
"우리 함께 노력 해 봅시다 나폴레옹은 그랬지요 불가능이란 없다고..."
라며
절망에 빠져 있던 현봉학박사를 진심으로 위로하며 용기를 주기도 하였습니다.
지휘관들은 연일 머릴 맞대어 작전회의를 계속하였고 .
며칠 후 알몬드장군은 현봉학박사를 불러 함흥의 민간인 4,000~5,000명을
기차로 함흥까지 수송하라는 기분좋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포니대령은 화물선(군수송선)에 피난민을 태워 나르자는 제안도 하였습니다.
현봉학박사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짚차를 타고 함흥으로 달려 가서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사람들은
"모세가 나타났다"
고 소리치며 기뻐하였습니다
그 날 밤 함흥역에서 미군이 약속한 4,000명의 10배가 넘는 5만명 이상의
함흥시민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와 일대 아수라장이 벌어졌지만
다음 날 새벽 2시30분이 되어서야 겨우 4,000명은 태운 기차는 떠났고
기차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밤새도록 산길과 논길로 걸어서 흥남부두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명예로운 후퇴가 시작되었습니다
출 애굽기에 비교되는 모세의 기적을 만들어 낸 현봉학박사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해 낸 구원자였습니다.
알몬드 장군
흥남철수작전의 총사령관으로
LST화물선에 철수하는 군병기류를 몽땅 버리고 대신 피난민을 태우게 명령 내린
훌륭한 분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놔 두고 갈 수 없다 이 사람들을 모두 구출하도록 하라"
그리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일이 이렇게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오로지 인류애로...